칼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복한 마음의 삶의 양식을 전하는 전농교회 목사님들의 칼럼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말에 성악공부를 하기로 결정하고 난 뒤 처음으로 음반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대전 유성 시가지에 있는 작은 음악사였습니다. 그곳에서 테이프를 하나 샀는데 앨범 제목은 ‘The Essential José Carreras’였습니다. 수백 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 수집 역사의 시작이었던 셈이지요. 성악에 대한 아무런 배움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호세 카레라스의 그 잘생긴 얼굴만 보고 구입했던 것 같습니다.
테이프 앞 뒷면의 곡 순서를 다 외울 정도로 그의 부드럽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아이가 부모님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말을 배우듯 가장 먼저 들었던 테너의 목소리였기에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첫 만남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스페인 출신의 호세 카레라스는 정통 이탈리아 테너와는 결이 다른 개성이 강한 스타일에 속합니다. 그보다 기본 발성이 탄탄한 베냐미노 질리나 페루치오 탈리아비니의 노래를 처음 접했다면 저의 발성도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운명이겠지요. 호세 카레라스의 노래를 들으며 저는 성악이 자기 과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로맨틱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음반에 실린 노래 중에서 발성이나 가창 때문이 아니라 그 음악만으로 저를 사로잡았던 곡이 있었습니다. 바로 ‘Panis Angelicus/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저를 엄습했던 그 거룩함이 아직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루돌프 오토가 이야기했던 '누미노제'의 경험이었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처럼 저는 그 음악을 통해서 거룩함을 마주했고 하나님께로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인간의 창작물로서의 영역을 넘어선 음악의 또다른 힘을 체험했습니다. 애초에 음악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인간과 소통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Panis Angelicus’는 우리 말로 ‘생명의 양식’으로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천사들의 빵’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말씀하신 ‘영생하게 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Panis angélicus fit panis hóminum;
dat panis cǽlicus figúris términum;
O res mirábilis! mandúcat Dóminum
pauper, servus et húmilis.
천사의 양식은 우리 양식 되고
천상의 양식을 우리게 주시네
오묘한 신비여, 가난한 주님 종이
주님을 모시는 커다란 이 감격여여
임마누엘의 은혜로 낮아지신 예수를 통해 낮고 비천한 우리가 천사들의 양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오묘한 신비요 커다란 감격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특히 한국교회의 일원들 중에 그 신비와 감격을 진정 체험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먹고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향한 굶주림과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육신의 굶주림과 배고픔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평생 가장 배고팠을 때와 가장 목말랐을 때를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육신에 비하면 우리의 영혼의 감각은 날 수 없는 새 만큼이나, 두더지의 시력만큼이나 퇴화해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영혼의 감각을 다시 깨워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독하게 육신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는 육신의 감각을 통해 영혼의 굶주림과 갈급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가장 배고프고 목말랐을 때보다 더 예수님을 사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또한 가장 배고팠을 때 처음 먹었던 그 음식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장 목말랐을 때 처음 들이켰던 그 음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장 배고팠을 때 그 배고픔을 달래 주었던 음식처럼, 가장 목말랐을 때 갈증을 해소시켜 줬던 그 물이나 음료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에 감사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면 됩니다. 그럴 때 점점 우리의 영적 감각이 깨어나게 됩니다.
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의 감각은 매우 예민하게 날이 서 있습니다. 조금만 배고파도 짜증이 나고 조금만 목말라도 마실 것을 구합니다. 예전에 비해서 너무 쉽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 있기에 우리가 그 배고픔과 갈급을 모를 뿐이지 육신의 욕망은 더욱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의 샘물로 우리의 영적 배고픔과 갈급함이 먼저 채워 져야 합니다. 생명의 양식, 생명수의 샘물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숨결, 예수님의 흔적, 예수님의 향기, 예수님의 살과 피, 예수님의 미소, 예수님의 눈물,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발걸음,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온전히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입으로 섭취해서 배가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완전히 내 안에서 소화되어 나의 일부가 됨을 의미합니다. 머리로만, 경험으로만, 몸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존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먹는다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스스로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그 오묘한 신비와 커다란 감격을 이 음악을 통해 조금 더 가까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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